유모차부대와 부모노릇
광풍제월(光風霽月). 며칠 전 지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이 말을 사인해주자 무슨 뜻인지 물었다.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뜻한다고 하자 대뜸 “과연 인간 역사에서 그런 때가 있었을까요?”라고 미소지었다.
연초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이기도 한 광풍제월은 원래 비가 갠 뒤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처럼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이르는 말이다. 북송시인 황정견이 유학자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에 나온다. 어쩌면 광풍제월은 적자생존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영원히 마음속에만 품고 있는 유토피아일 것이지만 그런 꿈꾸기라도 없다면 인간사회가 너무 삭막하지 않겠는가.
이전에는 잘 다스려진 사회의 출발을 ‘덕치(德治)’에 두었다. 덕치는 덕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이상사회의 통치이념으로 흔히 ‘요순우탕(堯舜禹湯)’으로 대표된다. 군왕의 덕치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경우 왕실에서는 덕으로 무장한 지혜로운 왕을 만들기 위해 임신전후부터 태교에 엄격했다. 출생이후에는 시강원을 두어 세자교육에 만전을 기했다.
굳이 왕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민간에서도 덕망있는 어진 인간을 만들기 위해 태교에 철저했다. ‘언문지’를 쓴 유희의 어머니 사주당 이씨가 쓴 ‘태교신기(胎敎新記)’에는 어머니의 마음상태에 대해 세심하게 언급하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이 동요하면 피도 동요하게 된다. 만약 잠시라도 경건한 자세를 잊는다면 이미 그 피가 잘못되어 자식이 잘못될 수 있다.”
당대를 살아가는 부모들 또한 자녀에 대한 관심은 이전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열성 아빠는 뱃속의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음악을 들려주는 ‘부성태교’를 몸소 실천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일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촛불시위가 확산되면서 여성의 동참이 늘어났고 급기야 만삭의 임신부 뿐만 아니라 유모차부대가 등장한 것이다. 처음 이 장면을 접하고 너무나 뜻밖이어서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태교에 이어 열성적으로 자녀교육에 나서는 부모들이 유모차를 끌고 ‘잠재적 위험상태’가 도사리고 있는 거리 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경찰 시위 진압대가 유모차에 소화기를 분사하는 아찔한 사건이 일어났다. 언론을 통해 이 장면을 보고 누구나 혀를 찼을 것이다. 어떤 이는 경찰의 무자비성을, 또 어떤 이는 아이를 위기로 내몬 아빠의 무모함을 비판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유모차부대에 실려 온 시위현장의 아이들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사회병리연구소 백상창 소장은 “유모차에 태워져 시위대에 나온 어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거대하게 불타오르는 촛불과 군중의 함성, 과격한 충돌 장면 등은 어린아이의 눈에 원시적인 공포상태를 야기해 ‘정신적 외상’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신적 외상은 평생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으로 여러 가지 정신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백 소장은 “부모 손에 이끌려 시위현장에 나온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자라면서 심리적으로 법을 무시해도 좋다는 현실인식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합리적 절차나 관행을 중시하는 사회생활이나 조직생활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30년 후의 미래마저 촛불시위가 ‘시대정신’이 된다면 그것은 이 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촛불시위는 우리 세대에 끝을 내야하며, 아이들 세대까지 ‘학습’될 유산은 아닐 것이다.</font>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사행동에 대해 “이스라엘의 과도한 군사행동은 무능함의 표현이다”라고 꼬집은 바 있다. 이명박 정권의 폭압적인 시위진압은 지젝의 표현처럼 ‘정권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더라도 간난아이마저 폭력의 위협에 노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의 세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안전한 요람’에 있어야 한다.
‘임신부는 험한 곳에 가지 말고,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한다. 너무 놀라면 태어나는 아이에게 전간(간질)이 생긴다.(心有大驚 子必癲癎)’
동의보감 잡병편(권10)에 나오는 임신 중 금기사항의 일부 내용이다. 참을 수 없는 나라사랑으로 ‘유모차 부대’가 되겠다는 부모라고 하더라도 동의보감의 이 글귀를 집을 나서기 전에 거듭 되새겨보길 바란다. 한순간 부모의 행위로 아이를 평생 힘겨운 삶을 살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노릇(parenthood)’ 하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