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메이커] 술 그리고, 비틀거리는 명예

by 사회병리연구소 posted May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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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그리고, 비틀거리는 명예

2005.8.3 <뉴스메이커>

 

 

국회의원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피우는가 하면, 현직 검사와 판사가 만취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한다. 한 술 더 떠 술 취한 기자는 택시 운전사를 폭행하고 호텔 직원을 발길질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술이 사람을 먹고, 술이 인격을 먹고, 결국엔 술이 명예를 먹어치우는 게 현실이다.

 

오늘 저녁 술자리가 있다면 그 함정에 조심하라. 술이 당신의 명예를 노릴 것이다. 사회 고위층의 음주 망신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국회의원·검사·판사·기자가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계속 터진 것이다. ‘폭탄주 문화’의 온상지인 정계·법조계·언론계에는 하룻밤의 실수로 그동안 공들여 쌓아온 개인의 명예가 여지없이 실추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음주사고’가 거듭되고 있다.

 

 

곽성문 의원 당직 사퇴 금주 선언

때 아니게 내려진 금주령이 화제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7월 중순 검찰에 폭탄주 금지령을 내렸다. 현직 검사가 동료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질 무렵 내린 경고성 조치였다. 7월 21일 민주평통 송파구협의회 출범회의에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이 이재정 평통부의장에게 술을 끼얹어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면서 한나라당은 “술을 좀 끊어라”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지난 6월 곽성문 의원이 대구지역 상공인들과 술을 마시다 맥주병을 던진 데 이어 또다시 발생한 ‘음주사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물의를 일으켰던 곽성문 의원은 당 홍보위원장직을 사퇴하고 금주를 선언했다. 지난 7월 24일 발생한 어느 판사의 음주운전은 가장 최근 사례에 꼽힌다.

 

청주지법 이 아무개 판사는 만취상태에서 충북 청주시에서 택시에 탑승, 서울로 가던 길에 운전사가 전화를 걸기 위해 휴게소에서 잠깐 차를 내린 사이 택시를 몰고 서울로 달리다 고속도로상에서 검거됐다. 경찰의 음주측정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 0.19%로 거의 만취상태였다. 그는 “술김에 서울로 가려고 택시를 탔지만 왜 택시를 운전하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이 판사는 음주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지만 만취상태로 택시를 몰았다는 이유로 절도죄는 적용되지 않았다. 6월 23일 터진 박 아무개 검사의 ‘음주사고’는 크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로 예민한 시기에 단속 경찰이 현직 검사에게 수갑을 채워 연행하는 바람에 인권침해 문제까지 거론됐다.

 

당시 음주측정 결과 나타난 박 검사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37%. 혈액검사에는 0.146%로 나타났다. 박 검사는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된데다 운전면허가 취소(면허취소 기준 0.10%)됐다. 7월 13일 ‘조선일보’ 홍 아무개 기자의 음주 난동도 현직 검사의 수갑 논란 만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하는 그는 서울 코리아나호텔 정문 앞에서 개인택시 운전사에게 승차 거부를 했다며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다. 연행되기 전 호텔 안으로 들어가 호텔 직원에게 발길질하는 장면이 휴대전화 카메라에 잡힌 것이 더 큰 망신을 불러왔다.

 

주변 관계자들은 이날 홍 기자가 한나라당의 한 주요당직자와 만난 자리에서 폭탄주를 2∼3잔 마셨다고 전했다. 이후에도 또 다른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음주 난동’으로 이어진 것. 홍 기자 주변의 한 인물은 “평소 점잖고 합리적인 기자”라면서 “하지만 술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측면이 강한 점이 그런 상황으로 번지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언론의 따가운 눈길을 받아야 했던 음주 난동의 주역은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 지난 6월 대구지역 상공인과 골프 후 뒤풀이 자리에서 말다툼 끝에 맥주병을 던졌다. 대구지역 의원들이 대거 참석한 자리에서 야당 홀대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폭탄주가 몇 차례 돌았지만 만취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한나라당 인사들의 전언. 세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강재섭 원내대표는 ‘나비효과론’을 언급하며 곽 의원의 추태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술 추태 사건 여야가 따로 없어

하지만 정작 한나라당 일부에는 동정론이 남아 있다. 대구지역의 한 의원측은 “지역 상공인들이 해도 너무 할 정도로 지역 의원들에게 불만의 대상이 돼왔다”면서 “대구시당 수석 부위원장이던 곽 의원이 방식은 잘못 됐지만 의원들을 대신해 불만을 토로했다고 봐야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인사는 “맥주병과 안주를 몇 차례 던질 때까지 의원들 중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로 볼 때 의원들 역시 불만을 공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9월 김태환 의원이 골프 후 술을 마시다 경비원을 폭행한 사건이 벌어진데다 곽 의원 추태 사건에 이어 최근 다시 박계동 의원이 민주평통 모임에서 맥주를 끼얹는 사건이 벌어져 술과 관련된 사건에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 김낙순 의원의 음주 폭행설이 한 주간지에서 보도되자 한나라당은 김 의원을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 맞불 작전에 나섰다. 김 의원은 지난 5월 지역구의 한 식당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던 도중 다른 좌석에 있던 고향선배와 다툼을 벌인 것으로 보도됐다.

 

김 의원측은 “단순히 그쪽에서 술을 더 마시고 가라는 것을 뿌리치던 와중에 승강이가 벌어진 것일 뿐 폭행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부인했다. 김 의원측은 “음주 난동과 관련해 계속 언론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피해자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어 이날 술자리 사건은 김 의원과 주간지 간의 1차 진실게임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의 2차 진실게임으로 번지고 있다.

 

 

폭탄주 마시며 기싸움 벌이는 고위층

음주사고 논란에 휩싸인 의원들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초선 의원. 일부에서는 초선 의원들이 1년차에는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다 2년차에는 느슨해지는 바람에 물의를 일으키는 ‘2년차 징후군’으로 특징짓고 있다. 지도층의 대표적인 ‘음주사고’는 1986년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이다.

 

국회 한 국방위원이 고급요릿집에서 군장성을 향해 컵을 던져 난투극을 벌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청와대 총무비서실 안 모 행정관이 2003년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귀가하다 택시운전사와 시비가 붙어 폭행했다가 사표가 수리됐다. 전문가들은 최근 사회지도층의 잇따른 음주난동 사고를 심상치 않은 경고 메시지로 본다. 한 개인의 음주 행태는 망신으로 끝난 후 잊혀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사회병리연구소장 백상창 박사(신경정신과 전문의)는 “현재 한국인의 무의식 심리를 들여다보면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면서 “다만 신분 때문에 억압해오던 것이 술을 마시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백 박사는 이를 근대화-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가치가 전도돼 나타난 ‘사회정신분열증’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판·검사, 기자, 정치인 같은, 소위 사회지도층의 경우 무의식 속에 하나의 질서를 잡아 보겠다는 의식이 잠재해 있다가 폭탄주가 들어가는 순간 억압장치가 풀리면서 무의식이 튀어나와 해프닝으로 이어진다는 것.

 

법조계와 언론계, 정계에서 일반화된 폭탄주 문화가 주범이라는 지적도 있다. 열린우리당 이경숙 의원은 “군사문화의 잔재인 폭탄주 문화가 음주 난동의 원인”이라면서 “폭탄주로 이뤄지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식적인 결정이 이뤄지고, 오히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형식적인 이야기만 하는 문화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여성 정치인들은 폭탄주 문화를 남성 중심의 문화라고 비판한다.

 

남성들이 술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폭탄주를 마신 후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성희롱, 성매매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 이 의원은 “언론인, 정치인, 법조인들이 폭탄주를 마시며 기싸움을 벌이는 것을 종종 봐왔다”고 말했다. 최근 잇따른 음주사고에 대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독특한 분석을 내놓았다.

 

노 의원은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일반인들이 지도층에 대해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반면 지도층은 이를 자신에 대한 모멸로 받아들이면서 불만을 표출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면서 “민주화된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일부 계층의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치인들의 음주 난동은 특히 노 의원의 지적처럼 자신의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야당 의원을 무시한다’(곽성문 의원)거나 ‘국회의원에게 축사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박계동 의원) ‘경비원이 국회의원을 몰라본다’(김태환 의원)는 등의 경우가 그렇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X파일의 축들이 모두 폭탄주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정계·언론계·법조계 등 사회의 여론을 이끌어나가는 그룹이 폭탄주 문화를 통해 서로 ‘공범 의식’을 확인하는 획일주의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참여연대 시민감시국 김민영 국장은 “도덕적이어야 할 공인들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데서 벌어지는 일”이라면서 “실수를 한번은 할 수 있지만 국회는 국회대로, 법조계는 법조계대로 조직에서 서로 감싸면서 제대로 징계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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